― 남아 있는 기록 사이에 하나의 가설을 넣어본다면
먼저 분명히 해두자.
이 글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글이 아니다.
새로운 사료를 발견한 것도 아니고, 기존의 정설을 뒤집을 증거가 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록들을 가능한 한 그대로 놓아둔 상태에서 질문 하나를 던져보는 역사적 사고실험이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총탄에 맞았다. 그런데 그가 바로 그 순간 생물학적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우리는 어떤 기록을 통해 알고 있는가?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1. 이순신이 노량에서 총탄에 맞았다는 것은 의심할 이유가 거의 없다
노량해전 직후의 공식 기록은 비교적 분명하다.
전투가 끝난 지 며칠 뒤인 11월 25일, 명나라 수군을 지휘한 진린은 조선 조정에 이순신이 앞장서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보고했다.
12월 1일 비변사의 보고에서도 이순신은 노량에서 혈전하다 탄환에 맞아 목숨을 잃은 장수로 처리된다. 조정에서는 이미 그의 사당과 제사를 논의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음 사건들을 굳이 의심할 필요는 없다.
노량해전이 있었다.
이순신은 전투를 지휘했다.
그는 총탄에 맞았다.
그 직후 이순신이 죽었다는 인식과 보고가 형성됐다.
명군과 조선 조정은 그가 전사했다고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단단하다.
그런데 질문을 조금 바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총탄에 맞은 이순신의 몸을 실제로 누가 확인했는가?
누가 호흡과 상태를 살폈는가.
치료는 시도되었는가.
누가 사망했다고 판단했는가.
누가 시신을 인수했는가.
누가 염습하고 입관했는가.
가족 가운데 누가 입관 전에 직접 시신을 확인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의 최후는 매우 자세한 것 같지만, 질문을 이쪽으로 옮기면 기록은 갑자기 희미해진다.
2. 11월 30일, 조정은 아직 시신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이 전사했다고 조정이 이미 알고 있던 1598년 11월 30일, 예조는 그의 제사 문제를 논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但屍首覓得與否 時未的知
“다만 시신을 찾았는지 여부를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한다.”
이 기록이 이순신의 시신이 실제로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장의 정보가 조정에 전달되기까지 시간차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조정은 이순신의 죽음을 이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 시점까지 그의 시신 확보 여부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상황이 바뀐다.
12월 11일 예조의 기록에는 이순신의 喪柩, 즉 상구가 이미 전사한 곳을 떠나 아산의 장지로 향하고 있다고 나온다.
따라서 기록을 그대로 연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피격 → 전사 보고 → 조정의 전사 인정 → 시신 확보 여부 불확실 → 상구가 마련됨 → 아산으로 운구
그런데 그 사이에서 정작 우리가 찾는 과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누가 이순신의 신체를 확인하고 죽음을 확정했으며, 누가 그를 입관했는가.
이 글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빈칸이다.
3. 후대 기록으로 갈수록 최후의 장면은 오히려 풍부해진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상당히 구체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순신이 전투를 지휘하다 총탄에 맞고 不省人事, 즉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상태를 군사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전투를 계속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특히
時其子薈在船
즉 **“그때 그의 아들 이회가 배에 있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이회가 북과 깃발을 이용해 지휘가 계속되는 것처럼 했다는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난중잡록』은 이순신의 기함에서 작성된 현장 전투일지가 아니다.
조경남이 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이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것, 다른 자료에서 얻은 것들을 편년하여 남긴 기록이다.
따라서 이 기록의 범위도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난중잡록』에는 이회가 배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정보를 조경남에게 누가 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회 자신인지, 송희립이나 다른 장수인지, 이름 없는 군사인지, 어떤 문서인지, 이미 형성된 전승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이순신 최후의 전승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각각의 세부사항을 독립적인 현장 목격 사실로 곧바로 확정해주는 자료라고 보기는 어렵다.
4. 유성룡에게도 공식 보고에는 없던 장면이 있었다
유성룡이 남긴 이순신 관련 메모에도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이순신이 위험을 무릅쓰자 부장들이
“대장께서 스스로를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
라는 취지로 만류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직접 나가 전투를 독려했고 결국 날아온 탄환에 맞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난중잡록』과 또 다른 부분을 채운다.
『난중잡록』이
“통제사가 쓰러졌는데 어떻게 전투가 계속되었는가?”
를 설명한다면,
유성룡의 기록은
“통제사가 왜 총탄에 맞을 만큼 위험한 곳에 있었는가?”
를 설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최후의 장면은 이렇게 점점 풍부해지는데도 우리가 처음 던진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
총탄에 맞은 뒤 실제로 누가 이순신의 죽음을 확인했는가?
5. 세 개의 층
그래서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세 층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는 공적인 사실과 보고의 층이다.
노량해전이 있었고 이순신이 총탄에 맞았으며 전사했다고 보고되었다.
명군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조선 조정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 부분은 강하다.
둘째는 최후의 상황을 설명하는 이야기의 층이다.
부하들이 위험하다고 만류했다.
이순신이 직접 독전했다.
총탄에 맞아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의 상태를 숨겼다.
이회가 배에 있었다.
북과 깃발을 이용해 지휘를 계속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난중잡록』과 유성룡의 기록 등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셋째가 육체적인 죽음 확인의 층이다.
누가 상처를 살폈는가.
누가 치료했는가.
누가 사망을 판정했는가.
누가 시신을 확인했는가.
누가 염습하고 입관했는가.
가족 가운데 누가 직접 시신을 확인했는가.
현재 확인한 주요 기록에서는 이 세 번째 층이 앞의 두 층에 비해 현저하게 희미하다.
그렇다면 그 빈칸에 아주 작은 가설 하나를 넣어볼 수 있다.
6. 만약 이순신이 그 순간에는 죽지 않았다면
여기서부터는 기록이 아니다.
가설이다.
이순신은 실제로 노량에서 총탄에 맞았다.
중상이었다.
의식을 잃었다.
주변에서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전투 중 통제사의 죽음이 알려지면 함대가 동요할 수 있으므로 그의 상태를 감추고 전투를 계속했다.
그런데 전투가 끝난 뒤 몸을 옮기는 과정에서 극소수의 사람이 미약한 생존징후를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문제가 생긴다.
이미 통제사는 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명군도 그렇게 알고 있다.
조선군도 그렇게 알고 있다.
곧 조정으로 전사 보고가 올라간다.
그런데 정작 이순신은 살아 있다.
여기에서 거대한 음모조직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이 정말로 이순신이 죽었다고 믿어야 한다.
실제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몸을 옮기고 치료한 몇 사람뿐이다.
그리고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 역할에 장남 이회를 놓아볼 수 있다.
물론 이회가 실제로 이런 일을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이것은 이 글이 만드는 가설이다.
가설 속 이회는 아버지의 죽음을 숨긴 사람이 아니다.
정반대다.
아버지의 생존을 숨긴 사람이다.
7. ‘죽음을 숨겼다’는 이야기가 뒤집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의 최후에서는 부하들이 죽은 통제사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죽음을 숨긴다.
그런데 이 가설에서는 어느 순간 방향이 뒤집힌다.
처음에는 정말 모두가 이순신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투 중에는 죽음을 숨긴다.
전투가 끝난 뒤 극소수가 생존을 발견한다.
그 순간부터는 생존을 숨긴다.
대부분의 장수와 군사는 아무것도 모른다.
진린도 이순신이 죽었다고 믿는다.
조정에 보고한 사람들도 그렇게 믿는다.
왕도 그렇게 믿는다.
따라서 공식 기록 가운데 누구도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기록했을 뿐이다.
8. 그렇다면 관은 어떻게 했을까
이 가설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장례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이순신의 상구가 아산으로 갈 수 있었을까.
여기에서는 적어도 하나의 적극적인 조작을 가정해야 한다.
빈 관이든 다른 방식이든, 이순신의 관으로 받아들여지는 상구가 만들어져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이 정확하게 우리가 발견한 기록의 빈칸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11월 30일 조정은 아직 이순신의 시신을 찾았는지 확실히 모른다고 했다.
12월 11일에는 이순신의 상구가 이미 아산으로 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가설이 사실이었다고 상상한다면 결정적인 사건은 그 사이, 혹은 조정에 소식이 전달되기 이전의 현장에서 일어나야 한다.
누군가 관을 마련한다.
관은 닫힌다.
그리고 장남 이회가 그 관을 아버지의 관으로 받아들인다.
그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다시 확인할 이유는 크게 줄어든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입관을 직접 담당한 사람의 기록이나 가족이 입관 전에 이순신의 시신을 직접 확인했다는 동시대 자료가 확인된다면 이 부분은 크게 흔들린다.
9. 그런데 이회에게도 곧 벼슬이 내려온다
여기에서 우리가 찾아본 또 하나의 기록이 연결된다.
1598년 12월 1일 비변사의 보고에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포상과 함께 이런 내용이 나온다.
又至於子息 皆爲除職
자식들에게까지 모두 관직을 제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즉 이순신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죽은 직후부터 국가의 포상 대상이 되었다.
당연히 장남 이회도 그 가운데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기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하는 것이 있다.
포상이 결정되는 것, 관직이나 품계를 받는 것, 실제 실직에 부임하여 근무하는 것은 같은 사건이 아니다.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으로는 이회가 정확히 언제 처음 실직에 부임했는지를 확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차이가 이 가설에서는 중요해진다.
왕은 죽은 충신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가설 속 이회는 그 순간 살아 있는 아버지를 비밀리에 돌보고 있다.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받은 벼슬인데,
정작 그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10. 이회는 곧바로 부임했을까
여기에서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부친상이다.
이순신의 공식적인 사망일은 1598년 11월 19일이다.
그렇다면 이회는 세상에서 이미 아버지를 잃은 상주다.
국가가 이순신의 공을 기려 관직을 내렸다고 해서 반드시 곧바로 실직에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회가 국가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핵심 중신이나 전쟁지휘관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상기를 마친 뒤 실직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다.
정확한 부임일을 현재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1601년 어느 날 이회가 부임했다고 역사적 사실처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공식적인 부친상을 마친 1601년 전후부터 실제 관직생활에 들어갔다는 시간표는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설과 묘하게 겹친다.
11. 상복을 입은 채 살아 있는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
가설 속 시간을 다시 돌려보자.
1598년 11월.
세상에서는 이순신이 죽었다.
이회는 아버지의 상주가 된다.
상복을 입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버지가 살아 있다.
중상을 입고 누워 있는 아버지를 극소수의 사람과 함께 돌본다.
이순신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는다.
총상과 출혈, 감염과 전쟁 동안 누적된 육체적 소모가 그를 계속 약하게 만든다.
몇 달이 흐른다.
어쩌면 1년 남짓이 흐른다.
그리고 1599년 말이나 1600년 무렵,
이순신은 정말로 죽는다.
그런데 이회는 아무것도 새로 할 수 없다.
이미 상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부고를 낼 수 없다.
다시 곡을 할 수도 없다.
다시 장례를 치를 수도 없다.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이미 1년 전에 죽었다.
그러므로 이회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이미 치르고 있던 아버지의 상을 계속 치르는 것.
12. 이상하게도 두 번의 죽음이 하나의 상 안에 들어간다
이렇게 생각하면 공식적인 부친상이 묘한 기능을 하게 된다.
1598년 11월 19일 시작된 상은
처음에는 세상이 알고 있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상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 실제 이순신이 죽는다.
그때부터 같은 상복은
이회만 알고 있는 아버지의 실제 죽음에 대한 상이 된다.
새로운 의식도 없다.
새로운 기록도 없다.
그저 같은 상이 계속된다.
그러다 1601년 전후 공식적인 상기가 끝난다.
세상의 기준으로도 아버지의 상이 끝났고,
이회의 개인적인 시간에서도 실제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때서야 이회는 왕이 이미 내려놓은 관직을 받아 실제 세상으로 나간다.
이것은 기록으로 확인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회의 정확한 부임 시점이 확인되지 않는 현재의 빈칸 속에서는 가능한 시간표 가운데 하나다.
13. 그리고 1603년, 이번에는 어머니였다
여기에서 실제 기록이 다시 등장한다.
1603년 2월 『선조실록』에는 이회가 노모의 병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정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李薈以老母病重 呈辭
그리고 선조는 특별히 이렇게 말한다.
薈乃舜臣之子也
“이회는 바로 이순신의 아들이다.”
선조는 이순신의 처가 아직 살아 있다며 해당 도에서 먹을 것을 지급하도록 한다.
이 기록은 적어도 1603년 무렵에는 이회가 관직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어머니의 병이 위중해지자 그 일을 내려놓으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앞의 가설과 연결하면 이상한 대칭이 생긴다.
아버지의 마지막에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실제로 죽어도 다시 상복을 입을 수 없었다.
다시 곡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 곁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다.
이번에는 살아 있는 부모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다.
관직을 내려놓겠다고 왕에게 말할 수도 있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어머니 곁에 있을 수도 있다.
이번에는 갈 수 있었다.
가설 속 이회에게 1603년의 이 기록은 그래서 조금 다르게 읽힌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세상 몰래 지켜야 했던 아들이,
이번에는 세상에 이유를 밝히고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장면이 된다.
14. 그렇다면 이순신 자신은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이 가설에서 마지막으로 설명해야 할 사람은 이순신 자신이다.
왜 살아 있었다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여기에서는 그의 실제 심리를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에 나타나는 그의 행동을 토대로 하나의 인물을 상상해볼 수는 있다.
1597년 이순신은 파직되고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다.
죽을 수도 있었다.
풀려난 뒤에는 백의종군했다.
어머니를 잃었다.
아들도 잃었다.
수군은 칠천량에서 거의 무너졌다.
그런데도 다시 전쟁으로 돌아왔다.
그 행동을 보면서 이런 사람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에게 가장 강했던 것이
“나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가 아니라
“적을 물리칠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
였다면 어떨까.
15. 처음으로 ‘끝났다’는 말을 들은 사람
가설 속 이순신이 정신을 차린다.
자신이 얼마나 다쳤는지는 먼저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군은 어떻게 되었느냐.
물러갔다.
수군은?
살아 있다.
전투는?
이겼다.
전쟁은?
끝났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수년 동안 처음으로 이상한 상황이 찾아온다.
고문을 당할 때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백의종군할 때도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끝나지 않았다.
아들이 죽었을 때도 끝나지 않았다.
수군이 거의 전멸했을 때도 끝나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답이 있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그 답이 사라진다.
적은 물러갔다.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자신마저 이미 죽었다.
16.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필사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
이순신이 죽고 싶어 했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지 않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약을 주면 먹는다.
상처를 치료하면 치료받는다.
이회가 부축하면 일어난다.
그러나 예전처럼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는 이유가 없다.
전쟁 중에는 살아야 했다.
자신이 살아야 수군을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싸워야 할 적이 없다.
자신의 장례도 치러지고 있다.
조정은 자신을 충신으로 애도한다.
아들은 자신의 관을 모시고 있다.
살아 있음을 밝힌다면 자기 삶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동시에 이미 형성된 모든 질서를 뒤집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끝났으면 되었다.
죽으려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또 한 번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17. 이회가 유성룡을 만났다면
그리고 여기에서 마지막 작은 상상을 하나 더 넣을 수 있다.
이순신이 실제로 죽은 뒤 이회가 유성룡을 만났다고 해보자.
물론 그런 만남을 입증하는 사료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순전히 이 글의 가설이다.
다만 유성룡은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에 관해 공식 보고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부하들이 위험하다고 만류했다.
이순신은 듣지 않았다.
직접 나가 전투를 독려했다.
그리고 탄환에 맞았다.
그 이야기를 누가 유성룡에게 전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가설 속에서는 그 사람이 이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회는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는 노량에서 총탄을 맞았다.
부하들은 만류했다.
그래도 직접 싸웠다.
그 상처에서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단 하나만 말하지 않는다.
그 죽음이 1598년 11월 19일 바로 그 순간은 아니었다는 것.
18. 그래서 기록은 거의 그대로 남는다
이 가설의 재미는 기존 기록을 대대적으로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진린의 보고도 그대로다.
조선 조정의 판단도 그대로다.
이순신이 총탄을 맞았다는 사실도 그대로다.
『난중잡록』의 不省人事도 그대로 둘 수 있다.
이회가 배에 있었다는 전승도 그대로 둘 수 있다.
유성룡이 기록한 부하들의 만류도 그대로다.
11월 30일 조정이 시신 확보 여부를 아직 확실히 알지 못했다는 기록도 그대로다.
12월 11일 이순신의 상구가 아산으로 향했다는 것도 그대로다.
이순신의 죽음 뒤 자식들에게 관직을 내려준 것도 그대로다.
이회가 부친상을 치렀을 것도 자연스럽다.
1603년 이회가 어머니의 병 때문에 정사한 기록도 그대로다.
가설이 들어가는 곳은 기록을 지우는 자리가 아니다.
기록과 기록 사이의 빈칸이다.
피격 → 인사불성 → 사망
이라고 하나의 사건처럼 읽던 것을 잠시 떼어
피격 → 인사불성 → [짧은 생존] → 실제 사망 이라고 읽어보는 것이다.
19. 무엇이 발견되면 이 가설은 무너지는가
이 이야기는 검증된 역사가 아니다.
그리고 반증될 수 있다.
오히려 무엇이 발견되면 무너지는지가 상당히 명확하다.
노량 직후 이순신의 신체를 직접 확인했다는 독립적인 동시대 기록.
상처와 사망 상태를 확인한 사람의 기록.
치료 과정에 관한 기록.
염습과 입관을 담당한 사람의 기록.
이회나 가족이 입관 전에 시신을 직접 확인했다는 기록.
이런 자료가 발견된다면 이 글에서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은 급격하게 좁아진다.
이회의 행적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가 1599년부터 어느 지역에 실제 부임하여 지속적으로 행정업무를 수행했다는 자료가 확인된다면, 장기간 아버지를 직접 돌보았다는 설정은 수정되어야 한다.
반대로 그런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순신의 생존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다.
기록의 부재는 생존의 증거가 아니다. 다만 기록이 없는 곳과 기록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구별하면, 우리가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어디부터 추론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20. 두 번 죽은 이순신과 한 번밖에 곡할 수 없었던 아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굳이 ‘이순신 생존설’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부르는 순간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진다.
이순신이 죽음을 위장해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십수 년을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런 질문이다.
노량에서 총탄을 맞은 이순신이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아 있었다면?
몇 달.
길어야 1년 남짓.
그 정도다.
그에게 그것은 두 번째 인생조차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장례가 치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자신의 관을 모시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노량에서 죽은 자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이회가 돌아온다.
이순신이 묻는다.
장례는 잘 치렀느냐.
그렇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왔느냐.
많이 왔다고 한다.
그리고 더 묻지 않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적은 물러갔느냐.
그렇다.
그러면 되었다.
얼마 뒤 이순신은 정말 죽는다.
이번에는 장계가 올라가지 않는다.
왕도 모른다.
진린도 모른다.
실록에도 적히지 않는다.
그리고 아들은 이미 상복을 입고 있다.
새로 곡할 수도 없다.
아버지가 정말 죽은 날을 세상에 말할 수도 없다.
그저 원래 치르던 상을 끝까지 치른다.
세월이 흐르고 상기가 끝난다.
그제야 이회는 세상으로 나가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1603년, 이번에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번에는 왕에게 말할 수 있다.
이번에는 벼슬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번에는 부모의 마지막을 공개적으로 지킬 수 있다.
역사 속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죽었다.
이 가설도 굳이 그 날짜를 지울 필요는 없다.
그날 죽은 것은 조선 수군을 지휘하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만약 그의 육체가 조금 더 버텼다면,
그 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은 사람은 영웅도 통제사도 아니었다.
평생 자신을 일으켜 세웠던 마지막 이유,
“아직 적이 남아 있다.”
는 말이 마침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더 이상 자신이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한 인간 이순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록과 가설의 경계
이 글에서 노량 이후 이순신의 생존, 극소수에 의한 치료와 은폐, 이회의 관여, 상구에 관한 조작, 이회의 실제 이순신 간병, 노량 이후의 실제 사망, 이회와 유성룡의 접촉은 모두 가설이다. 이를 직접 입증하는 사료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다음 사항은 실제 기록에서 출발한다.
-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
- 1598년 11월 30일 조정은 이순신의 시신을 찾았는지 여부를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 12월 11일에는 이순신의 상구가 아산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 『난중잡록』에는 이순신이 피격되어 不省人事가 되었다는 서술과 時其子薈在船, 즉 당시 이회가 배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다만 이 개별 정보의 최초 출처는 분명하지 않다.
- 유성룡이 남긴 자료에는 부장들이 이순신의 직접적인 위험 노출을 만류했다는 취지의 보다 구체적인 최후 장면이 전한다.
- 이순신 전사 직후의 기록에는 그의 자식들에게도 관직을 제수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 1603년 『선조실록』에는 이회가 노모의 병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정사했다는 기록과 함께 선조가 薈乃舜臣之子也, “이회는 바로 이순신의 아들이다”라고 말한 대목이 있다.
따라서 이 글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이순신이 살아 있었다”가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훨씬 작다.
우리가 확인한 기록에서는 ‘총탄에 맞은 이순신’과 ‘생물학적으로 죽음이 직접 확인된 이순신’ 사이의 모든 과정이 독립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 작은 틈에,
기록을 가능한 한 그대로 둔 채,
한번 이런 이야기를 넣어본 것이다. 2부에 계속.
